지친 영혼의 또다른 쉼터 '마음병원'

15 January 2009 4 Comments Category: 밑줄긋기


음악을 통한 치료나 미술을 통한 치료에 대해서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여기에 더 추가하자면 놀이를 통한 치료도 있고 글쓰기를 통한 치료도 있다. 우울할 때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달래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듯이 정신과적인 측면에서 모두다 두루 쓰이는 방법이다.

치유의 글쓰기

그 중에 치유를 위한 글쓰기는 제법 많은 블로거들에게 공감을 얻지 않을까 한다. 관심있는 사람들은 이미 ‘치유의 글쓰기‘나 ‘치유하는 글쓰기‘와 같은 책을 접했을 수도 있겠다. 이런 책을 읽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내가 블로그에 글을 왜 쓰는지, 다이어리에 일상을 끄적이는 것은 왜인지, 나의 일기장이 보물 1호인 이유는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상처받은 나의 영혼과 어느정도 연결시킬 수 있지 않을까.

어제 읽은 ‘마음병원‘은 글쓰기를 통한 치유에 대한 책이 아님에도 치유의 글쓰기로 글머리를 시작한 것은 이 책을 소개하는 문구 때문이다.

울고 싶은 그대를 위한 마음병원. 고뇌하는 영혼을 위한 위로의 아포리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치유. 상처받은 마음 치유서

그랬다. 내가 홈페이지를 만들고, 블로그를 만들고 글을 썼던 것은 내 스스로를 달래고 치유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이 블로그를 만들때는 ‘내 영혼의 희망샘’, ‘지친 영혼의 쉼터’라는 부제를 달았으며 지금도 여전히 샘터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장병용 목사와 류연복 화백이 들려주고 보여주는 마법의 언어와 그림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는 한껏 부풀어오른 솜사탕과 같이 커졌다.

지친 영혼의 쉼터 마음 병원

솜사탕. 달콤하고 부드럽고 풍성하지만 꾹 쥐면 보잘것 없이 초라해지는 것이 솜사탕 아니던가. ‘마음병원’은 끝까지 그 보드라움을 선사하는 책이었을까.

도종환 시인의 추천사를 가볍에 훑어보고 책장을 넘기자 따스한 그림이 반긴다. 그림에 대한 지식도 없고 감상하는 법도 모른다. 그런데 이 책장에서 난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평화로움과 따스함을 느꼈다. 깨알같은 글씨가 가득한 책만 보다가 여백을 보아서일까, 갑갑한 빌딩숲 아래서 살다가 좁은 지면이지만 탁 트인 뭔가를 보아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노란색의 색감 때문일까.

마음병원 표지

‘마음병원’은 글마다 류연복 화백의 판화가 함께 한다. 글 보다 그림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것은 ‘치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내게는 글 보다 그림이 더 큰 위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빈 종이에 꽃 한송이, 빈 종이에 강아지 한 마리를 그린 것이 과연 화가의 작품이 맞나 싶었다. 유치원 다니는 꼬마가 그린 그림과 다를 바 없지 않냐는 생각까지 했으니 류연복 화백에게 크나큰 실수를 할 뻔 했다.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림을 보았을 때 비로소 전하는 바를 깨달을 수 있었다. 간결한 문장 하나에, 소박한 그림 하나에 많은 가르침이 들어있다는 것을.

장병용 목사의 글과 함께 실린 그림들은 얼핏 글과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그림을 다시 한번 음미한다면 그 그림이 왜 거기에 있는지 느낄 수 있다. 글만으로 전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을 그림으로 채워주고, 그림의 느낌을 다른 이의 경험으로 조금이나마 구체화 할 수 있는 서로를 위한 세심한 배려 같다고 할까.

글은 어떨까. 수필집을 좋아하면서도 즐기지 않는 이유는 말 그대로 수필이기 때문이다. 공감을 하면 한없이 재미있지만 간혹 저자의 일상에 너무 치우치면 남의 이야기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마음병원’은 보통 이상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건 저마다 주관적인 판단이 있을테니 내가 점수를 매긴다는게 소용은 없겠지만.

사실 ‘마음병원’의 내용이나 문장이 좀 상투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써내려간 영혼을 어루만지는 아름다운 문장을 기대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영혼을 치유하는 책으로 생각했었으니까. 그런데 아쉽게도 이 책은 상처받은 영혼을 직접 보듬어 주지 않는다. 내 영혼이 상처받았음을, 상처받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지도 않는다. ‘울고 싶은 그대를 위한’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책장 어디에서도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없다.  

대신 잊고 지내던 지난 시절을 떠올리게 해주고, 세월 속에 조금씩 바래져 가는 꿈을 다시금 상기시켜 준다. 지금의 어려움을 담담히, 혹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이겨내는 작은 힘을 불어넣어 준다.

저자가 목사님이라 그런지 중간중간에 종교적인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성경 구절을 인용하기도 하고 사목활동을 하던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는데 일상적인 정도의 이야기지만 옅은 종교적 색채에도 민감한 분들에게는 거부감을 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저자가 성경만 인용하는 것은 아니다. 꼭지마다 좋은 싯구절을 인용하여 글 몇 줄로 표현하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해준다. 떠오르는 시 이야기와 음악 이야기가 그림과 함께 부족함을 채워준다.

향수 속으로

책을 읽다보면 자장면 이야기가 나온다. 자장면에 대한 향수와 서민의 애환이 서려있는 중국집에 대한 그리움으로 혼자서도 자장면을 먹으러 간다고 한다. 저자는 어린 시절 고향의 ‘중화루’라는 중국집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지만, 중국집에 대한 나의 기억은 ’500원’과 ‘졸업식’이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싼 자장면 가격은 500원이다. 500원을 내고 사먹은 기억은 없지만 머리를 깎으러 갔다가 ‘자장면 한 그릇 값이랑 같네’라는 생각을 하던게 아직 기억난다. 그러고보면 자장면 가격이 많이 올랐다고 하지만 가벼운 주머니로도 그 맛을 여전히 느낄 수 있지 않나. 같은 500원이던 이발료가 어느새 만원이나 되었지만 자장면은 3천원으로 배를 불려주고, 후식으로 어린 시절의 추억도 맛 볼 수 있다.

졸업식과 자장면을 떼어놓을 수 없다. 지금이야 졸업식 마치고 자장면 먹으로 가는 학생이 과연 있기나 할까 싶은데, 그땐 졸업식 하는 날은 중국집에 불나는 날이었다. 내 유치원 졸업식이었는지 동생의 유치원 졸업식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사촌 누나의 졸업식이었는지는 가물가물 하지만 동네 중국집에서 낯익은 얼굴을 어렵잖게 보던 기억이 난다. 패밀리 레스토랑이 있던 것도 아니고 있었다 한들 그 비싼 음식을 어떻게 배불리 먹으리. 온 가족 둘러 앉아 자장면에 탕수육 하나면 모두가 즐거운 만찬을 즐길 수 있었다.

탕수육. 어디 쉽게 먹을 수 있는 요리였던가. 졸업식이 아니면 감히 먹을 수 없는 고급 요리 아니던가. 그렇게 탕수육과 자장면은 나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졸업식 점심을 책임졌고, 심지어 고등학교 졸업식 후에도 졸업식 날에는 자장면을 먹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향수 서린 말 한마디에 중국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련한 과거로의 추억 여행. 잠시나마 지금의 삭막하고 각박한 현실을 잊을 수 있다. 당장 부닥친 어려움을 이기기까지는 역부족이라 하더라도 할퀴어진 생채기를 보드라움으로 한겹 감싸는 느낌이다.

상처, 인생그림을 완성하는 물감

한겹으로는 아직 앏은가. 그렇다면 아픔을 승화해 보는 것은 어떨까. 아픔은 아픔이 아닐 수도 있다 한다. 모두가 해탈의 경지에 이른 것도 아닐진대 어떻게 병을 벼슬로 받아들이며 아픔을 승화시킨다는 것일까. 물론 힘든 일이다. 다만 아픔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관점을 하나 알아두면 모르는 것 보다는 낫지 않을까.

상처는 정말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무서운 독일까. 아니다. 상처야말로 인생이라는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하는 물감이다. 상처가 있기에 우리는 진정 깊은 사랑을 할 수 있고 상처 덕분에 따뜻하고 정직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으며, 상처를 통해 한층 더 고결한 영혼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

나무도 암에 걸린다고 한다. 감나무 가지가 부러져 그곳으로 불순물이 들어가면 검게 뭉쳐진 듯한 무늬가 만들어지는데 그게 감나무의 암이란다. 그런데 그런 상처를 지닌 감나무가 오히려 아름다워서 고급 가구를 만드는 재료로 사용된다고 한다. 앞서 본 류연복 화백의 판화를 기억하는가. 거기에 바로 먹감나무가 있었다. 이 이야기를 읽고 난 다음에 보는 먹감나무 판화는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나.

친척 어른이 얼마전 말기암 선고를 받으셨다. 이미 그 전부터 어느정도 예견을 하시긴 했지만 막상 이제 삶을 정리해야 할 때가 가까워온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을 터이다. 어떤 위안의 말을 해야할 지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대신 이 책을 건네보는 것은 어떨까. 상처의 승화. 나무도 승화시키는 상처인데 우리라고 이겨내지 못할까.

슬픔조차 따뜻한 것으로 승화시키는 마음의 치유서 ‘마음 병원’. 직접적으로 어루만져주는 손길을 찾을 수는 없을지라도 위안을 받는 느낌을 얻을 수는 있다. 그 위안은 글이 주는 것도, 그림이 주는 것도 아니다. 글을 읽으며, 그림을 보며 잠시 마음이 가는대로 흘려보내는 사이에 내 스스로를 위안하는 것이다.

바쁜 출근길에 지하철 안에서 짬짬이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여유로운 날 차 한잔과 함께 글에 담긴 의미를, 판화에 담긴 의미를 음미하며 읽기를 권한다.

Share and Enjoy:
  • Print
  • Digg
  • Sphinn
  • del.icio.us
  • Facebook
  • Mixx
  • Google Bookmarks
  • Blogplay

Possibly Related Posts:


4 Responses

Write a comment
  1. 작가와 동감할수 있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참 좋은것 같아요.^^ 책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되더군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G_Gatsby 20 January 2009 at 11:14 pm Permalink
    • 유독 이런류의 글에 잘 빠져드는 것을 보면 저도 상처가 많은가 봅니다. 어쩌면 길게 이어지지 않고, 머리 쓰지 않고, 쉽게 읽을 수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구요.

      LUV™ 23 January 2009 at 3:33 pm Permalink
  2. 마음이 따뜻해 지네요. :)
    시간 있을 때 한 번 봐야겠어요.

    자유 21 January 2009 at 8:29 am Permalink
    • 이제 자유님에게서 자유가 빼앗길 시간이 머지 않았네요. 국시 합격은 축하할 일인데 인턴하실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LUV™ 23 January 2009 at 3:34 pm Permalink

Write a Comment

Commenter Gravatar